거듭남은 전적으로 생명의 문제입니다.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함으로 우리는 영원하고 파괴되지 않는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관계(생명의 관계)를 갖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거듭남에 대한 이 진리는 불분명하고 충분히 강조되지 않으며 많은 경우 완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거듭남과 거듭남이 가져오는 유기적인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명확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거듭난 결과로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특별한 종류의 생명, 곧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과 똑같은 조에(zoe)의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Vine's Dictionary). 신약 성경에서(한국어로는 생명과 생활 두 가지로 번역되지만) 서로 구별되는 세 개의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비오스(bios)로 수명(8:14)과 생활의 관습과 방식(딤전 2:2), 생활의 수단(12:44, 8:43)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두 번째는 슈케(psuche)로 마음, 생각, (천연적인 생명), 인격을 가리킵니다(2:20, 12:22; 9:4). 세 번째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조에(zoe)입니다. 조에(zoe)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과 똑같은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생명입니다. 아버지는 이 생명을 그분 자신 안에 가지고 계셨으며 이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습니다.(요한복음 526)(367-368).

다음 개요는 "조에(zoe)"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에게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여줍니다.

  • 아버지는 "조에(zoe)"의 근원이다.(5:26)
  • 아들은 "조에(zoe)"의 체현으로 사람이 "조에(zoe)"를 갖기를 갈망하신다(1:4, 5:26, 10:10)
  • 그 영은 "조에(zoe)"이고 "조에(zoe)"를 준다(8:2, 6:63, 고전 15:45)
  • 우리는 아들,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조에(zoe)를 영접하여 신성한 본성에 참여ÇÏ´Â자가 된다(3:15-16, 36, 요일 5:11-12, 8:10, 2:20, 3:4, 벧후 1:4).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내용을 보려면 여기를 누리세요.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사실대로 진술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관계

하나님의 생명을 영접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면 거듭남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관계(생명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사실대로 진술한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일 3:1-2). 폴 빌하이머(Paul Billheimer)는 그의 책 "보좌를 향하여(Destined for the Throne)"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 자신의 가정을 얻는 것이었다. 이 가정은 단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됐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출생하여 그분 자신의 "", "유전자"에 병합된다. "오래전, 심지어 세상을 만드시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우리를 위해 하실 것을 통해 우리를 (유전학적인 의미에서) 그분 자신이 되게 하실 목적으로 우리를 택하셨다"(1:4, 5:25-27, 32LB). 이 개인적이고 유기적인 가족 관계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은 무한히 광대하고 지혜로운 창조의 계획과 새 출생을 통한 구속을 마음에 품으셔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 안으로" 이끌고 계신다.(2:10) 요한복음 112절과 13절은 유일하고 기이한 산출 방식을 세우기 위해 구속의 계획이 도입되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유일하고 기이한 방법에 의해 "많은 아들들"을 낳으시고 거룩게 하는 과정으로써 그들을 점진적으로 징계하여, 그들을 영광 안으로 이끌고 계신다.(36-37)

전통적으로 거듭남에 대한 종교적인 관념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믿는이들을 입양하여 그들에게 아들의 위치를 주지만 그들과 생명의 관계는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이러한 전통적인 종교적인 관념보다 훨씬 더 심오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어디에서도 양자 관계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거듭남을 아이의 출생에 비유했습니다. 마빈 빈센트(Marvin R. Vincent)는 그의 헬라어 단어 연구에서 요한복음 112절에서 사용된 자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Tekuou(자녀)는 본성이 동일한 관계를 나타내는데 반해 uioV(아들)은 오직 입양과 상속권을 나타낸다.요한은 결코 아들을 사용해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위치가 입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 생명의 결과라고 여겼기 때문이다."(Word Studies, 49) (Recovery Version 1 John 2:297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날 때 그들이 받은 생명이 피조되지 않은 생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의 요동하는 감정은 멈춰질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위치는 확고해 질 것입니다.

 

영원하고 파괴되지 않음

하나님의 가족의 유기적인 구성원인 믿는 이의 거듭남 또한 하나님 자신의 생명과 같이 영원하고 항구적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하며 파괴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벧전1:23), 우리는 영원하고도 깨지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립니다. 물질적인 영역에서 아이가 아무리 개구장이이고 말을 듣지 않아도 여전히 그는 그 부모의 아이입니다. 부모나 아이가 어떤 결정을 한다 해도 그들의 상호적인 관계를 취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관계는 행동이나 의지에 기초한 어떤 것보다도 앞서기 때문입니다. 인간 생명에서도 이것이 진리일진데, 하물며 영원한 하나님과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 사이의 출생 관계는 훨씬 더 확고되지 않겠습니까?

이 진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거듭남을 단지 영적인 전환이나 도덕의 회복으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누림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까지도 요동하고 쉽게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의 거듭남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기초를 두고 보장됩니다. 메리 멕도너(Mary E McDonough)는 이 계시의 중요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출생 관계의 의미를 보지 않는 한,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진보는 느리고 불확실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잘못을 행했을 때 그들은 은혜로부터 떨어져 영원한 생명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거듭났을 때 받은 생명이 창조되지 않은 생명, 곧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분의 자녀로 부르셨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서의 믿는 이들의 위치가 그들의 요동하는 감정에 따라 바뀌지 않을 것이다. 죄인이 그의 죄악되고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시인하고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분명히 돌이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면) 바로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한 그의 영 안에 그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12, 8:16-17 참조) 이것이 거듭남의 의미이다. (메리 멕도너, 하나님의 계획, 67)